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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소리MAD 10선 by 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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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 기획에서는 처음 인사드립니다. 근래 릴라라는 닉네임으로 주로 활동하고 있는 ReaLizer입니다.

제가 너무 좋아하고 또 신세지고 있는 소리MAD 10선이라는 기획에 올해는 작성자로 참여할 수 있게 되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특히 작년과 제작년에는 학교 일로 바쁘거나 권태기가 오거나 하여 몇 달씩 작품을 못 챙겨보곤 했었는데, 10선 덕분에 자칫 놓칠 뻔했던 명작들을 많이 알아가고 또 되돌아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제게 의미가 크고 또 고마운 기획입니다. 올해의 기사들도, 그리고 혹시나 만약에 제 기사도 다른 분들께 이런 방향으로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쁠 것 같네요.

앞 순서였던 oz Han 님, 카이사르 님, 여유만만 님의 기사는 충격 그 자체였죠. 다들 상상도 못한 콘셉트와 형식으로 고품질의 기사들을 작성해 주셔서 저도 너무 즐겁게 읽었습니다. 혹시나 아직 2023 소리MAD 10선이라는 기획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시거나 다른 기사들을 놓치신 분이 계신다면 아래 바깥고리를 참고해주세요.

다른 여러 의미로 훌륭한 기사들을 보면서, 솔직히 다들 이 정도까지 공들이실 줄은 정말 몰랐어서, 제 기사에 대한 부담감이 점점 커져 왔던 게 사실입니다. (여유만만님 앞서 폭탄 맞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신참이니만큼 조금 담백한 기사라도 다들 너그러이 봐주시리라 믿고 기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선정 기준

작품을 선정하는 모습

작품을 선정하는 모습

저를 작품 활동으로만 접해보신 분들께는 의외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제가 즐겨 만들던 스타일과 제가 즐겨 보는 작품들은 그 경향이 많이 다른 편입니다. 일례로 저는 가치무치 매드를 유독 안 좋아하는 편입니다 (충격고백)

특히 제가 소리MAD에 있어 중요시하는 요소가 남들과 조금 다르다 보니, 아래에는 '좋긴 한데 10선에 들어갈 정도인가?' 싶으실 작품들도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년 그리고 앞선 기사들을 보아 올해 놓쳐서는 안되는 최고의 작품들은 다른 작성자분들이 저보다 훨씬 더 잘 소개해주실 것으로 믿고, 제 개인적인 취향을 좀 더 반영하여 선정해 본 결과라고 봐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기준이 뭐냐고 하면, 바로 올해 제가 가장 많이 돌려 본 작품들이 되겠습니다. 자꾸 돌려 보고 싶은 작품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몇 가지 특징이 있으실 겁니다. 리듬감, 중독성, 안정감, 곡과 소재의 조합, 알면서도 당하는 펀치라인, 파도 파도 계속 새로운 요소가 보이는 디테일 등등...

이 중에서 제가 제일 높게 치는 가치는 리듬감, 특히 그루브입니다. 소위 '찰지다'라고 하는 비트나 통통 튀는 펀치감의 멜로디 조교 등은 리듬감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모범적인 예시들이지만, 사실 이들은 그루브와는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그루브는 방법을 안다고 해서 바로 만들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쉽게 수치화할 수 있거나 남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루브는 그보다 좀 더 오묘한 감각입니다. 그루브가 극에 달한 작품에서는 마치 랩, 아니, 소울 넘치는 흑인의 일상회화를 듣는 것 같은 부유감과 흥이 느껴진다고 하면 조금은 느낌이 전해질까요.

그루브를 다루는 동물적인 감각이 있는 제작자가, 음성 면에서 소재에 맞는 곡과 박자 면에서 곡에 맞는 소재를 가지고, 탄탄한 영감에 기반한 소재 탐색과 소재 탐색으로부터 비롯된 영감을 바탕으로, 대사 하나하나와 박자 하나하나를 고심하고 또 고심하여 갈고 닦은 결과물에서, 무엇보다 이 모든 시너지가 우연히 잘 맞았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게 바로 그루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저 재능 있는 예술가가 열심히 작업한다고 해서 반드시 최고의 예술 작품이 나오지는 않는 것처럼, 그러나 그보다 조금 못한 예술가가 우연히 신내린 영감을 받아 불후의 걸작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처럼, 그러나 예술과 친하지 않은 일반인의 손에서 나오기에는 명작이라는 이름은 아득히 먼 것처럼, 그루브 -- 그리고 더 나아가 음매드에도 그러한 예술적인 성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그렇기 때문에 저는 매드를 '알아듣는' 데에는 딱히 신경을 쓰지 않는 편입니다. 아래 기사에서는 10선이라는 기획의 특성상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해설을 덧붙여 놓았습니다만, 대부분은 최소 30번 이상은 돌려보고 난 후에야 가사 하나 정도 해석해보고 캐릭터 이름 검색해 보고 한 작품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작품의 백스토리를 아예 향유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선 작품을 먼저 좋아하게 된 후에, 나중에 꽂힐 때 의미도 해석해보고 네타도 알아보고 캐릭터도 조사해보면 더 와 닿는 게 있더라고요. 말하자면 '의미'는 어떤 작품들을 더 좋아하도록 돕는 요소일 수는 있지만 그 작품을 좋아하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는 아니라는 게 제 견해입니다.

물론 위는 모든 작품에 해당하는 이야기들은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들은 더더욱 아니겠지요. 제가 일본어를 신생아 레벨 정도로는 할 줄 알기 때문에 초견에 의미를 전혀 못 알아듣는 입장은 또 아니기도 하고요. 하지만 제 취향 이야기를 할 때 빠뜨릴 수는 없는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해서 다소 지루한 이야기지만 이렇게 적어 보았습니다. 아무튼 제 개똥철학 이야기는 이만 줄이고 본격적으로 작품 소개에 들어가 보겠습니다.

赤司ック

첫 번째 작품은 感想 님이 3월 18일 게시한 赤司ック(아카식)입니다.

썸네일(사실 위 불펌본의 썸네일은 수정 전 버전인지 본가와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블루 아카이브의 주인공 학생 중 한 명인 아카시 준코를 소재로 하여 '에고 록'을 제작한 작품입니다. 떠올리지 않기가 더 힘든 '준코 록'이라는 훌륭한 제목 대신 이런 괴상한 제목을 선택한 것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작품임이 느껴집니다.

1분 남짓한 러닝타임 동안 숨 돌릴 틈도 없이 아방가르드한 연출이 몰아치는 이 작품의 구성은 특히 블루 아카이브 소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다들 친숙하실 것 같은데요. 블루 아카이브 학생을 소재로 써야 한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구성을 리스펙트한 작품의 수가 약 25개에 달하는, 올해 가장 성공적인 '모든 일의 원흉'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의 구성이 템플릿화되는 경우도 리스펙트라고 부르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니코동의 전용 태그는 ブル赤司リーズ (블루'아카시'리즈)로, 니코대백과에도 등록되어 있으므로 템플릿에 대한 구체적인 해설은 생략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네타를 선도하게 된 작품이지만 음매드로서의 퀄리티도 결코 낮지 않습니다. 제작자인 感想 님은 개인작을 자주 올리는 편은 아니지만, 특유의 전위적인 전개와 감각적인 대사나열로 투고하는 블루아카 매드마다 컬트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분입니다. 마침 2022년 작품 중에 제가 제일 좋아하는 プリンを、二つも食べちゃいます!도 이 분 작품이네요. 그 중에서도 이 분의 대사나열은 항상 감탄스러운 그루브를 보여주기 때문에 제가 정말 좋아합니다.

몇 구간을 꼽자면 23초의 두 번째 "오당고 오당고"를 반 박자 당겨 시작하는 싱코페이션, 26초 "하나시떼"의 빠른 ㅅ+ㅌ 처리, 34초의 "다케다케도", 37초 "타베라레루"의 원본이 굉장히 짧은 '라'의 자연스러운 늘임 처리, 54초의 높은 톤의 대사나열 등은 (에고 록의 적절한 템포와 준코의 리듬감 있는 음성을 감안하더라도) 웬만큼의 감각이 없으면 이렇게까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들리도록 만들기 어려운 구간들로 생각되는데, 제가 이렇게 말해도 별로 와 닿지 않으실 만큼 너무 깔끔하게 처리된 게 인상 깊었습니다.

작년에 공전의 히트를 쳤던 テイキョウ・ヘイセィ・ダイガク의 사비도 그렇고, 중독성과 네타화 역량에 이런 빈틈없는 대사나열의 영향력이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습니다.

ライアーオンセイ

두 번째 작품은 aa 님이 10월 5일 게시한 ライアーオンセイ(라이어 음성)입니다. 음몽 네타 및 그보다 심각한 수위의 시모네타(구체적으로는 '소리 내어 읽는 일본어') 음성을 담고 있으므로 혹시나 일본어가 가능한 사람이 근처에 있다면 모쪼록 시청에 주의 부탁드립니다.

블루 아카이브의 주인공 학생 중 한 명인 텐도 아리스, 정확히는 이 아리스가 음몽 네타에 물들었다는 내용의 만화를 비공식 TTS로 더빙한 영상을 비롯한 블루아카 비공식 TTS 음성들(이른바 'AI 블루아카')을 소재로 '라이어 댄서'를 제작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위에서 소개한 아카식과 (딱히 놀랍지는 않은) 인연이 있는데요, 소재인 AI 아리스와 AI 이즈나 (& 시로코) 모두 아카식의 리스펙트 작품으로 처음 음매드화된 소재이기 때문입니다. (각각 天童ック久田ック)

평범하게(?) 음몽 네타를 읊는 아리스에 의해 작품이 진행되다가, 난데없이 이즈나가 천장에서 튀어나와서는 주군에게 TNTN이 작다는 둥 심한 말을 하더니 '배빵빵의 술' 같은 희대의 명대사를 외치다가 아리스에게 보컬을 넘겨줍니다. 이후 1분 8초부터 쏟아지는 응앗과 TNP와 GTMK 삼연타는 처음 듣고 정신을 잃을 뻔했습니다.

솔직히 음원의 만듦새가 아주 훌륭한 작품은 아니고, 10선으로 꼽기에는 퀄리티에 비해 네타성이 너무 짙은 작품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곡의 완급과 음절을 완벽하게 활용하여 소재가 가진 (개그적인)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충분히 명작으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이라고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번 10선의 선정 기준은 제가 얼마나 많이 돌려보았는지라서요.

여느 곡들과 비교했을 때 라이어 댄서의 B멜로 구간은 유독 드라마틱한 편인데, 곡이 끊겼다가 갑자기 시작되는 B멜로와 이즈나의 충격 발언이 시너지를 일으켜 예의 '알고도 당하는 펀치라인'이 만들어진 게 인상 깊었습니다. 저는 100번 보면서 이 TNTN 구간에서 100번 다 당했습니다. 다른 곡으로 만들었으면 이 정도의 충격은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이어지는 사비와 소재의 궁합은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여담이지만 저는 평소에 고수위의 소재를 그렇게 즐기는 편은 아닌데요, 특히 영상이 고수위인 경우나 시모네타가 비주얼로 나타나는 경우를 좀 싫어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처럼 음원'만' 저속한 매드의 경우에는 나름 좋아하는 편입니다. 생각해보면 이 작품 말고도 요새 블루아카 매드나 밈들은 유독 음성이나 텍스트만으로 시모네타를 치는 경향이 강해서 다소 부담없이 찾아보게 되는 것 같네요.

덧붙여 AI 이즈나 원본 영상 중 이 작품에 주로 쓰인 것은 이쪽입니다. 저만 당할 수는 없으니까 다들 감상문 한 장씩 써 오시길 바랍니다.

ルーレットコユキ

세 번째 작품은 こまり 님이 3월 18일 게시한 ルーレットコユキ (룰렛 코유키)입니다.

역시 블루 아카이브의 주인공 학생 중 한 명인 쿠로사키 코유키를 소재로 '룰렛 하우스'라는 곡을 제작한 작품입니다.

사실 굳이 적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을 만큼 이 작품의 장점은 명료합니다. '정신없는 학생'이라는 코유키의 캐릭터성을 곡의 분위기와 템포, 대사의 밀도와 그 배치, 감각적이고 명료한 영상 모두가 조화롭게 받쳐주는 구성입니다. 보고 나면 음매드 한 편을 봤다기보다 '코유키를 봤다'라는 감상이 들 정도입니다. 그 때문에 여타 음매드보다 접근성이 좋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유튜브 조회수가 무려 100만을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한 논케(...) 유저에 의한 한글 자막 영상이 올라오는 등 음매드계 내외로 상당한 인기를 자랑하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こまり 님은 평소에도 다양한 블루아카 학생들을 소재로 '캐릭터성의 강조'라는 콘셉트의 작품을 자주 만드시는 분인데, 유튜브 채널이나 니코동 마이페이지를 보면 블루 아카이브 이전부터 우마무스메 및 아이돌 마스터 밀리언 라이브의 주인공들로 이러한 작품활동을 계속해 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과거 작품들 전부를 챙겨보지는 못했습니다만) 그런 작품들 중에서도 룰렛 코유키는 이분 스타일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로 볼 수 있겠습니다. 위에서 잠시 이야기한 것처럼, 같은 천재가 만든 작품이더라도 모두가 최고의 그루브를 가지는 것은 아닌데, 저는 이 룰렛 코유키라는 작품의 곡과 소재와 콘셉트 각각이 그의 대사나열 성향과 미묘하게 더 큰 시너지를 내어 평소보다도 훨씬 효과적인 그루브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제작자가 작년 10월에 투고한 温泉開発 me! 또한 신나는 선곡과 쾌활한 캐릭터성이라는 조합에 힘입어 룰렛 코유키에 버금가는 인기를 끌었는데요, 앞으로도 이렇게 신나는 작품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평소처럼 다양한 테마와 분위기의 작품 활동 또한 계속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妖怪ボッチ

네 번째 작품은 YuZXs 님이 1월 9일 게시한 妖怪ボッチ (요괴 봇치)라는 작품입니다.

봇치 더 락을 소재로 '요괴체조 1번'을 제작한 작품입니다. 봇치 더 락은 작년 10월부터 방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이미 2022 10선에서부터 얼굴을 상당히 비추었던 바 있죠. 제가 니코동 랭킹 보는 법은 모르지만 아마 안 봐도 올해 매드 투고수 일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올해는 자칫하면 봇치 10선을 뽑을 뻔했다니까요 하하하.

그리하여 하고 많은 봇치 매드 중에 이 작품이 제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하면, 대중적인 구성신급 그루브의 오묘한 조합 때문입니다. 작품의 구성 자체는 니코동판이 좋아요 5000개를 받은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이른바 '잘 먹히는' 구성을 띄고 있습니다. 간결하고 원본에 충실한 영상, 봇치 매드 초기에 유행했던 중간중간의 기타, 담백한 비트, 원곡을 끊으며 수 번 등장하는 언어유희 네타, 중간중간 심심할 틈 없게 배치된 추임새 등등...

그런데 저는 무엇보다 이 작품의 대사나열 구간들 때문에 반복재생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무리데스x3"이나 비트박스 등등 국밥 소재의 적절한 활용은 그렇다고 치고, 제가 특히 마음에 들었던 부분 중 하나는 13초와 1분 25초에서 대사를 각각 반박/한박 씩 레이백 처리한 부분입니다. 여기는 원곡 보컬도 정박 처리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워낙 단순한 곡의 짝수 마디이다보니 심리적으로 레이백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은 구간인데, 들을 때마다 항상 허점을 찔리게 되는 구간이라고 할까요. 특히 후자인 "토리아이즈 콧치무이떼"는 천 번을 들어도 계속 듣고 싶을 것 같습니다.

이외에도 21초의 "프랑크톤 고토데스"를 비롯하여 귀에 착착 붙는 대사나열이 작품 내내 이어지는데요, 보통 이런 대중적인 구성의 매드에서 이 정도 그루브를 느끼기 쉽지 않기 때문에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그 밖에 인트로의 "에~"나 아웃트로의 '깡' 등등 담백한 부분들도 별거 아니지만 제 취향에 맞았네요.

이 제작자의 과거 작품 중에서 제가 즐겨봤던 작품으로 わはははーっ!!!가 있는데, 사실 그 작품의 그루브 자체는 굉장히 무난한 수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요괴 봇치에서 보여준 폼이 발전의 결과라면 굉장히 반가운 일이네요. 이 제작자의 2023년 투고 작품이 요괴 봇치 하나 뿐이어서 좀 걱정이 되는데, 올해에도 멋진 작품으로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저는 작년에 학업이 바빠짐과 동시에 권태기가 세게 찾아오는 바람에, '기사는커녕 10선을 다 채우지도 못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몇 달 씩이나 힘들어했던 기간이 있습니다. 그런 제 권태기를 완전히 날려버린 게 바로 '音MAD DREAM MATCH -天-'이었습니다.

제가 유명 제작자들에 별로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개인 취향의 무명 몇 명에게는 관심이 있습니다만) 하여 당시에 예고편은 고사하고 생방송 때도 챙겨보지 않았다가 뒤늦게 지인들끼리 모여 녹화본으로 보았는데, 말 그대로 다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멋진 작품들로 가득해서 완전히 몰입한 채 너무 행복하게 감상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혹시 아직 감상하지 않으신 분들이 계신다면, 특히 바로 아래에서 소개할 작품은 방송으로 볼 때 의미가 정말 컸던 작품이기 때문에, 반드시 작품 감상 후에, 가급적이면 방송 전체를 감상해주신 뒤에 나중에 읽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도 읽으실 분들은 읽으시기 때문에 가능한 한 스포일러 없이 소개하겠습니다. (그럼 왜 반드시라고 썼는지?)

女の子がかわいい合作(変わるかもしれません)

  • 니코동 (이쪽은 오히려 니코동이 대리투고라는데요?)

그리하여 다섯 번째로 소개할 작품은 팀 Aquarius(水無月☆★ & メスシリンダー)의 음MDM천 참가작인 女の子がかわいい合作(変わるかもしれません) (여자아이가 귀여운 합작 (바뀔 수도 있습니다))입니다.

귀여운 여자아이가 나오는 각종 애니메이션을 소재로 오토신스 메들리를 제작한 작품입니다. 사실 이렇게만 들으면 음MDM천의 다른 쟁쟁한 경쟁 상대에 비해 굉장히 무난한 구성인데,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가 잘 먹혀들어 통해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에 성공한 작품입니다.

개중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역시 중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하는 이 작품만의 오리지널 캐릭터인데요, 방송 직후부터 아직까지도 Aqu子(이하 Aqu코)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캐릭터가 이 작품의 매력에 얼마나 공헌했는지 새삼 느껴집니다. 특히 다른 애니메이션의 배경 및 캐릭터와 함께 등장할 때마다 그 작화에 맞게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그려지는 디테일에서 제작자들의 애정이 엿보이네요.

제가 이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역시 음원의 만듦새입니다. 사실 평범한 합작처럼 전개되는 초반부에서 남들은 그냥저냥 보고 있는데 저 혼자 벌써 취향저격을 당해서 난리를 떨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이 작품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뒤로 갈수록 제4의 벽 연출이라던가 새로운 곡이 등장하며 분위기가 전환된다던가 하는 부분에서 말 그대로 프로 급의 사운드 디자인을 보여줍니다. 초반부터 이어지는 무난한 미소녀 매드 스타일 음원과 중간중간에 끼어들기 시작하는 특수 연출 사운드의 대비가 정말 기가 막힙니다. 이런 분위기 자체에 대한 시도는 간간이 있어 왔는데, 이렇게까지 높은 연출력과 퀄리티로 분위기를 장악하는 작품은 전무후무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이것저것 파고들자면 끝이 없는 작품입니다만, 이를 전부 설명하면 너무 길어질 듯 하여 음원 이야기만 간략하게 해 보았습니다. 놓치기 쉬운 Aqu코의 활약상이나 숨겨진 메시지 등은 유튜브판 댓글이나 니코동 코멘트에서도 찾을 수 있으니 나중에 확인해보세요.

Aqu코 쨩, 덕분에 정말 즐거웠습니다. 앞으로도 힘내 주세요.

音MAD

여섯 번째 작품은 脅かす阿呆に盗る阿呆(イダルゴ & 芋タルト) 팀의, 마찬가지로 음MDM천 참가작인 音MAD (소리MAD)입니다.

'안돼요~ 도둑질이라니'라는 애니메이션을 필두로 다양한 소재를 사용하여 'anima'라는 곡을 제작한 작품입니다. 제목에서부터 범상치 않음이 느껴지는 이 작품은 소리MAD를 만든다는 행위와 그 결과물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인데요.

이 작품에서 제가 한글 자막 없이 알아들을 수 있었던 부분은 기껏해야 뭔가 불결한 분위기에서 인터넷을 하는 남자아이, 인타네또 야메로, 점점 음매드가 아닌 무언가가 되어가는 올스타 파트, 음매드란 무엇인가에 대해 여러 소재들이 답하는 장면 정도였습니다만, 혼돈 올스타 파트의 아스트랄한 감각과 아웃트로의 충격적인 애니메이션 정도로 이미 저로 하여금 경이를 느끼게 하는 데에는 충분했습니다.

경이는 예술 작품이 전달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감각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죠. 경이는 첫인상이지만 동시에 영구적입니다. 경이는 이해불능이지만 그렇기에 무엇보다 이해를 갈구하도록 만듭니다. 저는 이전까지 음매드라는 형식과 주제로 이런 느낌의 경이를 이끌어낼 방법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작품이 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역시 해석이 뒷받침되어야 진가가 드러나는 작품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겠죠. 그러니 제 나름대로 고찰해본 구간 하나만 짚어 보겠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미첼 가족과 기계 전쟁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신 분이 계실까요? 아마 합성물을 제작하거나 즐겨 보시는 분이라면 절대 잊어버릴 수 없는 영화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주인공인 케이티가 즐겨 만들고 또 즐겨 보는 '영화'들이, 분명 인디 애니메이션인데 황금기 YTP 근처 어딘가에 가까우면서도 나사 빠진, 말하자면 평행우주의 합성물 같은 모습으로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케이티에게 있어선 예술대학에 진학하면서까지 본격적으로 배우고 또 만들려고 하는 소중한 일인 반면 아버지에게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장난질로 인식되면서 가족 간의 갈등을 나타내는 핵심 소재로 쓰입니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제가 가장 인상 깊었던 점 중 하나는, 케이티의 '영화'를 어떤 특정 밈이나 형식에 가깝게 그려 알아볼 수 있을 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충분히 낯설게 그려내어 젊은 시청자들도 비교적 그 내용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작중 부모의 입장에 공감할 수 있도록 장치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점입니다. 아마 케이티가 정체불명의 인형 YTP 영상이 아니라 노홍철이 아이돌을 부르는 친근한 영상 따위를 만드는 설정이었다면 반갑긴 했겠지만 작품의 주제가 제대로 전달이 안 됐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갑자기 다른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왜 꺼냈냐 하면, 저는 이 소리MAD라는 작품의 혼돈 올스타 파트(2분 47초부터)가 위 애니메이션의 '영화'와 거의 같은 방향으로 설계되었고 또 같은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구간은 분명히 당신이 익히 아는 소리MAD를 그려낸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구간이 소리MAD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 구간이 소리MAD가 맞다고는 단언할 수 있습니까? 이 구간의 어디가 잘못되었습니까? 이 구간은 틀렸습니까? 이 구간은 올바릅니까?

3분 52초부터 다시 이어지는 꽤나 정상적인 올스타 구간을 지나면서 조금 전 혼돈에 대한 기억은 낮잠 중에 꾼 악몽처럼 찝찝한 뒷맛과 의문만을 남긴 채 증발해갑니다. 당신이 방금 목격한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것과 어떻게 다릅니까? 당신이 여태까지 봐왔던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조금 전에 목격한 것과 어떻게 다릅니까? 당신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만드는 것과 어떻게 다릅니까?

  • 바보같은 걸 만들었네요
  • 선배는 바보예요
  • 또 이상한 물건이 될 것 같네요

소리MAD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深圳东

  • 니코동 (비리비리는 굳이 링크하지 않아도 되겠죠?)

일곱 번째 작품은 FFFanwen 님이 6월 28일 게시한 深圳东(선전둥)입니다.

철도 소재로 佐藤直之 작곡의 'End of World'라는 곡을 제작한 작품입니다. 佐藤直之라고 하니까 처음 봤을 땐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猫叉Master+ 작곡의 투덱 15에 실렸던 곡이라고 하네요.

사실 인트로의 화면 구성만 아니었어도 대부분의 시청자가 이게 음매드라고는 생각 못하지 않았을까요? 실은 저도 처음 봤을 때 초반 1분 정도까지는 이거 설마 뮤비가 특이한 오리지널 곡인 건 아닐까 싶었습니다. 직접 보시면 아시겠지만, 단순히 음원과 영상의 퀄리티가 높다의 차원을 넘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애트모스피어와 구성과 연출을 선보이는 작품입니다.

제작자는 영상의 설명란을 빌려 제작 경위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데요, 정리해보자면 '출퇴근길 매일 지나다니던 선전둥이라는 역을 어느 날 문득 천천히 돌아보았더니 선전시에 대한 나의 지식과 무지 모두가 응축되어 있는 흥미로운 곳이더라, 그래서 작품화하고 싶어졌다'라는 내용입니다. 단순한 도중하차 작품 1이 아니라 일상에서의 감각과 영감을 토대로 치밀하게 쌓아 올려 만든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어차피 장점에 대해서는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니 그 플롯이라도 살펴보고 다음으로 넘어갈까요.


인트로의 빌드업은 전력이 조금 불안정해 보이는 신호등으로 시작하여 거리의 공사 현장과 자동차 소리, 역사의 안내방송 멜로디와 행인, 조금씩 커지는 열차 진입 안내음성, 그리고 실제 열차 진입 노이즈까지 점점 승차에 가까워지는 구성으로 진행되면서 끝을 맺고 이후부터는 열차를 타고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본격적으로 도중하차스러움을 풍기기 시작한 열차 안내음성들은 대략 '5호선 혹은 14호선으로 갈아타실 분들은 지금 하차하시기 바랍니다, 선전둥 역입니다' 같은 걸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따로 조사해보니 선전둥 역을 지나는 호선은 각각 3, 5, 14호선이라, 이 시점에서 타고 있는 열차는 선전 지하철 3호선 열차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선전둥 역에서 내리게 되면 무언가 흄 준위 수치가 낮아보이는 시민들 너머로 선전둥 역과 그 주변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어지는 사각형 러시존의 오브제들이 제작자가 직접 선전둥 역 근방을 돌아다니며 찍은 것들이리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겠죠.

그 이후 구간의 미장센은 말로 설명할 수 있을 만한 것은 아닙니다만, 종점인 솽룽역에 도착했다는 안내 음성만은 자막 덕분에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솽룽역은 선전 지하철 3호선의 종점이므로, 아까와 같은 호선을 탔다는 점에서 아마 집으로 돌아가는 길로 추측됩니다. 올 때와 다르게 돌아가는 길은 좀 험해 보이지만, 그래도 안내 음성에 자막도 달아주는 걸 보니 마음만은 따뜻한 모범 지하철 같습니다. 그렇게 출발할 때 보았던 솽룽역 앞 신호등이 아직 고쳐지지 않은 모습이 보이며 여정은 끝이 납니다.

HACHAMECHA

여덟 번째 작품은 なっつん 님이 7월 20일 게시한 HACHAMECHA입니다.

봇치 더 락을 소재로 Kou! 작곡의 '고속소립자충돌형가속기'라는 곡을 제작한 작품입니다. 뭔가 익숙한 아티스트 명의에 범상치 않은 제목이라 검색해 보았는데 제가 좋아하는 동인 앨범 시리즈의 4번째인 HARDCORE UTOPIA 4에 수록된 곡이더라고요. 3까지밖에 못 들어봤었는데 빠른 시일 내에 들어봐야겠습니다.

작품이 시작하면 26초 드랍에서 갑자기 한 대 얻어맞고 난 뒤, 45초쯤 정신이 돌아오고 나서부터 슬슬 설마하는 불안감이 엄습해오기 시작하는데요, 1분 10초에 들어서면서 설마가 확신이 되고 이 작품의 본질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3분 내내 끝까지 정말로 이렇게 갑니다. 이 작품의 태그 목록에서 처음으로 접하게 된 용어입니다만, 이걸 닷탄전법이라고 하는 듯 합니다. (별로 잘 알려진 태그는 아닌지 해당되는 다른 영상들에도 잘 안 달려있습니다) 한국에서 쓰인 적 있는 말 중에서는 그나마 '노 피치'라는 말이 가까우려나요?

어쨌든 저는 연말에 이 영상을 우연히 접하고 나서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위의 예시들처럼 제가 익히 봐온 닷탄전법 작품들은 브레이크에 가까우면서 루프성이 짙은 선곡이 많았고, 곡이 박자를 주도하긴 하지만 원곡의 사운드가 특별히 부각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HACHAMECHA라는 작품은 3분이 넘어가면서 반복도 없는 리듬게임스러운 장르의 곡을 가지고는, 원곡의 사운드와 소재를 완벽하게 조화시키는 박자 쪼개기와 믹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순히 잘 들리는 믹싱이 쭉 이어지는 게 아니라 구간에 따라 적절한 FX가 딱 필요한 만큼 들어가는데, 특히 중간중간에 강렬하지만 이보다 더 깔끔할 수 없는 디스토션이 치고 들어오는 부분들은 몇번을 봐도 항상 감탄하게 됩니다.

대사 쪼개기도 그냥 박자에 잘 맞추는 수준이 아니라, 곡의 강세에 적절히 맞춘다거나, 일부러 원곡의 다른 요소와 박자가 겹치지 않도록 피한다거나, 마디가 완전히 반복되는 경우가 없도록 조금씩 변화를 준다거나, 어구를 샘플링처럼 활용하거나 하는 능력이 말 그대로 프로 수준에 있습니다. 과장이 아니고 위 사항들은 실제로 전자음악 작편곡 시에 퍼커션이나 샘플링을 배치할 때 고려하게 되는 중요한 요소들이자 적잖은 음악적 감각을 필요로 하는 사항들인데, 이렇게나 단순해 보이는 매드에서 그런 점들이 여실 없이 드러나고 있으니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히로이의 "연금문제 정신붕괴"가 나오는 족족 쾌감 중추 하나하나가 자극되는 게 느껴질 지경입니다.

반면에 영상은 어찌 보면 너무하다 싶을 만큼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는데요, 좌우반전은 물론 음원에 FX가 적용될 때마다 매우 정직하게 영상으로도 보여주는 데에서 굉장한 고집이 느껴집니다. 생각해보면 이런 음원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영상이 있을까 싶기도 하네요.

하지만 경악스러운 점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제작자인 なっつん 님이 지금까지 니코동에 게시한 매드의 개수는 총 94개인데요, 이 분은 봇치더락 이외에 다른 소재를 사용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심지어 첫작의 게시일이 2022년 10월도 아니고 11월 30일입니다...??

이 なっつん이라는 분은 2023년 한 해동안 자그마치 81개의 봇치 매드를 게시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제가 이 분 작품의 1/3 정도를 감상해보았습니다만, 아마 첫작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작품에 멜로디 조교를 넣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세상에는 이상한 사람이 정말 많은 것 같네요. 마음에 듭니다.


슬슬 기사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요, 이미 알아차리셨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제 기사는 10선을 날짜 순서대로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는 뒷 순서로 갈수록 대체로 더 좋아하는 작품이 오도록 순서를 정한 다음에 기사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조정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대놓고 말씀드리자면,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매드들이 제가 제일 좋아하는 2023년 작품에 제일 가까울 것 같습니다. 그럼 지체 없이 이어가 볼까요.

ウママニア

아홉 번째 작품은 たこーちき 님이 10월 20일 게시한 ウママニア (우마마니아)입니다.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의 아그네스 디지털이라는 우마무스메를 소재로 '인간마니아'를 제작한 작품입니다. 말딸 유저라면 우선 제목과 썸네일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드는데(참고로 저는 한섭 초기에 이주일 정도만 플레이했기 때문에 이 작품으로 그녀의 존재를 처음 알았습니다), 썸네일의 이 찌그러진 금빛 박스는 아그네스 디지털 전용 스킬 중 하나인 ウママニア(정발 명칭은 '우마무스메 마니아')의 인게임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 디지털이라는 우마무스메는 위에서 본 전용 스킬의 명칭에 걸맞게 중증의 우마무스메 오타쿠이며, 무려 오로지 덕질을 위해 레이스를 뛰는 비범한 우마무스메라고 합니다. 본 작품에도 등장하는 "최애의 가까이(트랙 위)에서 최애를 느낀다"라는 말이 그녀의 캐릭터성을 잘 보여주네요.

이 작품을 보고 나서 든 생각은 '이보다 더 인간마니아라는 곡을 살릴 수 있는 매드가 있을까'였습니다. 제목이랑 주제만 봐도 이미 못해도 평작 이상인데, 디지털의 발성과 억양이 인간 마니아라는 곡의 속성과 템포에 완벽히 들어맞는 데다가, 제작자의 역량이 십분 발휘된 기가 막히는 '내추럴계' 대사나열까지 더해져 이보다 더 할 수 없는 조화가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정도로 모든 구간의 모든 대사가 다 귀에 박히고 뇌리에 박히는 작품은 정말 흔치 않았던 것 같네요.

여기에 더해 1분 32초의 ??????나 아웃트로의 괴성, 중간중간의 비명과 추임새 등등에서 이 제작자가 캐릭터의 음성 소재에 대한 이해도는 물론이고 그 매력을 어떻게 살리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감상이 들었습니다. 특히 38초의 쪼개진 "이" 같은 추임새는 보통 이렇게 귀엽게 살리기 쉽지 않은 디테일인데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제작자인 たこーちき 님은 이외에도 캐릭터성이 잘 살아있는 우마무스메 매드를 재작년부터 만들어 오고 계십니다. 똑같이 아그네스 디지털을 소재로 한 2022년작 +⋈(プラスデジタル)는 유튜브에서 높은 조회수를 기록한 바 있고, 가장 최근 작품인 토카이 테이오 소재의 何笑ってんのさ!는 니코동에서 큰 인기를 끌기도 했죠.

이렇게 보면 룰렛 코유키의 こまり 님과 상당히 비슷하게 작품 활동을 하신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차이점이 있다면 こまり 님은 아마 소재를 먼저 정하고 그 캐릭터성에 맞는 곡을 이후에 정하시는 것으로 보이는 데에 비해, たこーちき 님의 작품들은 선곡이 먼저이거나 곡과 소재의 조합 자체에 대한 아이디어에서 작품화를 시작하시는 게 아닌가 생각이 되네요. 여하튼 앞으로도 계속해서 멋진 말딸 매드 제작해주시면 정말 좋겠습니다.

忍っぽいですよ / 呉織あぎり

마지막 작품은 きゅう 님이 みなフレ 님과 공동 제작하여 2월 18일 게시한 忍っぽいですよ / 呉織あぎり (닌자 같은 거예요 / 고시기 아기리, 이하 닌같네)입니다.

킬 미 베이비, 그 중에서도 특히 아기리를 주인공으로 하여 '신 같네'를 제작한 작품입니다. '신 같네'를 사용한 음매드는 작년에도 올해에도 좋은 작품들이 정말 많이 나왔고, 작년 10선에 이어 올해 10선에도 벌써 (제 것까지) 세 작품이나 선정되면서 명실상부한 음매드곡 계의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하고 있네요.

닌같네는 저의 올해 10선 중에서 아마 가장 왕도적인 구성을 보이는 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저는 이 매드와 사랑에 빠진 것에 가깝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어디가 좋은지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전체적으로 어느 요소 하나 부족하거나 과하지 않은 든든한 퀄리티와 더불어 특유의 스토리텔링이 이 매드의 최대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딱 좋아하는 정도의 단단하고 안정적인 비트와 반주, 너무 얌전하지도 않고 튀지도 않는 '끊어치기식' 대사나열, 메인 소재와 반주를 충분히 강조하면서도 결코 원곡을 죽이지 않는 깔끔한 믹싱과 꼭 필요한 데에만 적절히 들어가 은근하지만 확실하게 연출을 돕는 FX, 원곡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아기리의 발성과 수준급의 보컬 조교, 딱 재미있을 만큼 활용된 가사 엮기 네타와 원곡 활용 네타, 끊어야 할 곳의 리듬감을 정확히 살리고 전개와 딱 맞는 완급 조절을 해낸 영상 등, 좋은 점이라면 하루 종일도 칭찬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제 인상에 깊게 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작품의 설득력을 책임지는 은은한 스토리텔링이었습니다. 이 스토리텔링에 대한 해석과 그 효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소개를 마쳐보겠습니다.


작품은 인술을 보여주겠다는 아기리의 말과 함께 인트로에서 A멜로로 전환됩니다. A멜로는 멜로디 조교 없는 아기리의 효과음과 가끔씩 보여주는 '풍' 등으로 진행되는데, 대단한 걸 보여주는 모양새는 아닙니다. B멜로는 아기리의 사기 인술키트들을 산 야스나와 그 실체를 밝히는 소냐짱의 대사나열로 진행됩니다.

그렇게 인술도 뭣도 아닌 변변찮은 모습만 보이던 아기리가 사비 직전 갑자기 능숙한 영어로 '이번에는 진짜 닌자 같은 거'라는 대사를 치며 사비가 시작됩니다. 이 보컬 조교의 특이점이라면 개사가 전무하다는 점인데, 이로 미루어 이 보컬은 아기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담은 게 아니라 인술의 하나로써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IQ가 내려가지 않는 술' 및 변장술과 같은 진짜 닌자 같은(?) 여러 인술들을 본격적으로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사비의 끝에 아기리가 다음으로는 분신술을 보여준다고 말하며 다시 A멜로에 들어가는데, 이번에는 전반부의 A멜로 구성에 더하여 정말로 아기리의 분신이 나와 코러스 및 "쟈쟝" 등을 불러주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웃트로의 '그냥 망원경'으로 바라보는 야스나에게 마치 보인다는 듯이 인사를 건네는 아기리 역시 인트로 부근과는 다르게 진짜 닌자 같음을 보여주는 모습을 보이면서 작품이 마무리됩니다.

위와 같이 플롯을 따라가면서 보면 전반적으로 아기리가 보여주는 인술 수준의 완급 곡선이 원곡의 전개나 음원 및 영상의 밀도와 정확히 맞아들어가면서 작품의 주제 의식과 몰입감을 극대화시키는, 놀랄 만큼 치밀한 구성의 작품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외에도 엮어보자면 오프닝의 인을 맺으려는 손과 아웃트로의 손가락을 올리는 모습의 수미상관 등도 여러모로 숨은 연출들이 눈에 띕니다.

이런 장치는 처음 감상할 때부터 파악할 수 있는 종류는 아니지만, 처음 감상할 때의 첫인상과 감각에는 분명히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제가 느낀 이 오묘한 몰입감도, 제가 이렇게 파고들어 분석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물론 이 모든 장치가 제작자의 의도 하에 설계된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무리가 있겠습니다만, 별로 중요한 사실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서론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명작'의 탄생에는 원래 우연이 동반되는 법이니까요.

마치며

...

이렇게 제 사심이 잔뜩 들어간 10선을 모두 보여드렸습니다. 어떻게 읽으셨을지 모르겠네요. 다른 분들에 비해 너무 일기장같은 이야기를 적은 건 아닌가 걱정도 됩니다 ㅎㅎ;;

사실 그루브니 귀여움이니 하는 것들 모두 개인차가 큰 요소이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호들갑 떤 만큼의 감상을 다른 분들께서도 똑같이 느끼시는 경우는 많지 않겠죠. 그래도 이렇게 제 감상을 남들에게 보여지기 위해 공들어 작성한 경험은 처음이라 감회가 새롭네요. 오늘의 기사가 여러분께 새로운 작품, 새로운 해석, 혹은 새로운 이상한 놈 하나라도 알아갈 수 있는 경험을 선사할 수 있었다면 정말 기쁠 것 같습니다.

다음 기사는 사계 님께서 작성해주실 텐데요, 소리MAD 10선 기획을 시작하신 분 답게 매년 훌륭한 작품들에 대한 훌륭한 분석을 보여주셨던 만큼 올해 기사도 정말 기대가 됩니다. 여러분도 부디 잊지 말고 본방사수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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